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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사전/일본어노래가사

마츠다 세이코 sweet memories 가사 해석

 


懷かしい痛みだわ 

그리운 아픔이네요

ずっと前に忘れていた 

아주 오래 전 잊고있었던

でもあなたをみたとき 

하지만 당신을 본 순간

時間だけ 後戾りしたの 

시간만이 되돌아갔어요



幸せと聞かないで 

행복한 지는 묻지말아요

嘘つくのは上手じゃない 

거짓말은 잘하지 못해요

友達ならいるけど 

친구라면 있지만

あんなには燃え上がれなくて 

그렇게 사랑할 수 없기에



失った夢だけが 

잃어버린 꿈만이

美しく見えるのは何故かしら 

아름다워보이는 건 왜 그렇죠?

過ぎ去った優しさも

지나가버린 상냥함조차도

今は甘い記憶

이제는 달콤한 기억

Sweet Memories 



Don't kiss me baby 

We can never be 

So don't add more pain 

Please don't hurt me again 

I have spend so many nights thinking of you 

Longing for your touch 

I have once loved you so much 



あのころは若すぎて 

그 떄는 너무 어려서

惡戲に傷つけあったふたり 

장난치듯이 쉽게 서로를 상처 입혔던 우리둘

色あせた悲しみも

빛바랜 슬픔도

今は遠い記憶 

지금은 아련한 기억

Sweet Memories



광고와 영화에서 사용된 ost로 누가 부른지 모르고 나중에 마츠다세이코가 나와서
부르는걸보고 많이들 반전이라고 생각했다지요.
그것도 그럴것이 마츠다세이코는 항상 밝고 아이돌스러운 노래만 불렀으니까
이렇게 성숙한 노래도 잘할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거 같아요.

세월이 지나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전설의 아이돌이라고 불릴만도 하네요.


 

 





마츠다 세이코 (まつだせいこ | 松田聖子 | Matsuda Seiko) 가수
출생
1962년 3월 10일, 일본
신체
159cm, 40kg
가족
딸 칸다 사야카
데뷔
1980년 앨범 [裸足の季節]


버블경제시대의 시티팝이 재유행하듯이 
그시대의 풍족함과 게으름 그리고 여유로움을 가장 잘나타내는 아이돌이 아닐까 싶네요.
아이돌오타쿠라는 말도 이때 마츠다 세이코로 인해 생겨났고,  
부릿코라고 성인여자가 일명 여우짓이라고 해야하나 
잘모르겠어요 하는 순진한 표정으로 멘트를 치는것도 이분덕에 유행했을 정도로 엄청난 분이다. 

일본의 가수로 1980년대를 대표하는 아이돌이자 배우이다. 후쿠오카 지방 유지인 
치쿠고노쿠니 다이묘의 자손 집안의 딸로 본명은 카마치 노리코.

1980년 4월, 18세의 나이에 <맨발의 계절>로 데뷔. 1970년대 전설의 가희인 
야마구치 모모에의 은퇴와 함께 바톤 터치를 하듯 데뷔하여 끊이지 않는
 히트곡과 화젯거리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돌 가수였다. 한국에서의 별명은 세이코(聖子)를 음독한 성자 이모.

음반 총 판매량 2,963만장으로 역대 가수 중 15위를 차지하며 쇼와 시대 역대 가수 중 총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1962년 3월 10일 후쿠오카현의 소도시 구루메 시의 중산층 가정에서 공무원인 아버지 카마치 츠토무와
 지역 PTA 회장인 어머니 카마치 이치코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8살 연상인 오빠 카마치 미츠히코는 명문으로 유명한 와세다대학 출신. 
태어날 당시에는 난산이었기 때문에 가사 상태였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소아 천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라키 중학교를 나와 미션스쿨인 신아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도쿄로 상경해 연예 활동이 가능한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1978년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유수한 연예인들을 배출한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사쿠라다 준코의 데모 테이프를 보내 지방 예선에서 우승.
 데뷔 당시의 캐치 프레이즈는 '끌어안고 싶어! 미스 소니'.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 가수 데뷔에 대한 부모의 반대가 심하였지만
 세이코의 노래를 들은 소니 측에서 "이 아이는 반드시 팔린다."고 확신하여 스카우트되었다.

처음에는 가수로 데뷔할 생각이 없었으나 어릴 적부터 놀이터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막대기를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불렀고, 
직접 카세트테이프에 학창 시절 유행했던 캔디즈나 이시노 마코 등의 아이돌 노래를 모창하는 것을 녹음할 정도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결정적으로는 1977년 고향인 구루메 시의 사진관 촬영 모델에 응모하여 선출된 것을 계기로 연예계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데뷔 이후의 탄탄대로와는 다르게 앞서 언급했듯 데뷔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1978년 '미스 세븐틴 콘테스트'에서 사쿠라다 준코의 '気まぐれヴィーナス'(제멋대로 비너스)를 불러 규슈 예선에서 우승했으나
 엄격한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로 데뷔가 무산된 것. 그리하여 1년간 부모님을 설득하여 허락받은 끝에 고교 졸업 이후 데뷔하여 
보통 데뷔 시기가 10대 중반이었던 여타 아이돌에 비해 다소 늦게 데뷔하였다.

규슈 예선에서 그 목소리에 감탄해 세이코를 발굴해 낸 CBS소니의 음악 프로듀서 와카마츠 무네오(若松宗雄)의 소개를 통해 1978년, 
대형 연예 기획사인 와타나베 프로덕션 산하인 음악학원에 다니게 되었는데, 소속사 측은 본사에서 보내져온 데모 테이프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O자 다리에 스타일이 안 좋았던 당시의 프로필 사진만 보고 사무소 채용을 불합격시켰다고 한다. 
2년 뒤 관계자는 땅을 치고 후회했을 듯

1979년, CBS소니의 와카마츠 무네오는 그녀가 다른 5개의 소속사에 거절당하자 마지막으로 이후 세이코의 커다란 인연이
 되는 선뮤직 프로덕션의 사장 아이자와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 세이코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러나 아이자와 사장과 중역이었던 
후쿠다 토키오 또한 그녀의 계약을 보류한 상태였다. 최초에 선뮤직 측은 마츠다 세이코를 아이돌로서 세일즈하려는 생각조차
 없어서 다른 소속사와 같이 거절하려고 했고, 데뷔하고나서도 CF에 얼굴을 비추는 대신 다른 연예인을 기용할 정도로 기대치가 낮았다고 한다.
 하지만 데모 테이프를 들은 소속사 측은 좋은 목소리와 가창력을 높히 평가하여 후쿠다 전무가 세이코가 사는 구루메 시의 자택까지
 찾아서 완강한 부모님을 설득해냈고, 이후 그해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직접 도쿄로 상경한 세이코 본인의 가창력과 의지를 보고 나서야 극적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가족이 있는 고향을 떠나 1979년 도쿄로 상경한 세이코는 소속사를 선뮤직 프로덕션으로 옮겨 사장인 아이자와 
히데요시의 집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연예활동이 허가되는 호리코시 고등학교로 전입. 우여곡절 끝에 소속사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후에 대형 기획사로 발돋움하는 이 당시의 선뮤직은 사쿠라다 준코를 배출해냈긴 하지만 비교적 소형 기획사였고, 
또다른 스카웃으로 발탁되어 2년 동안 다른 신인을 데뷔시키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 정도로 사활을 걸었던
 나카야마 케이코(中山圭子)라는 기대주의 대형 신인이 데뷔를 앞둬 세이코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 데뷔할지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나
 정작 세일즈 성적이 좋지 않아 사무소가 난관에 빠지자 다음 타자라는 카드를 꺼내든 사무소 측과 세이코 본인의 강한 의지를 본 
나카야마 케이코가 양보를 해주어 겨우 데뷔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후는 다들 아는 대로 그녀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